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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부모들의 착각

부족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종종 강연을 하러 다른 도시를 간다. 말이 강연이지 미국에서 그 간 겪은 일 들을 다른 부모들과 나누는 모임이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 아들을 10년 간 지켜본 경험을 들려주고 부모로서 미국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지난 번에는 뉴욕에 가서 뉴욕과 뉴저지 지역의 한인 부모들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뜻 밖에도 생각을 같이하는 교육 전문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미국의 한인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 대단히 많은 투자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투자 대비 결과는 그리 좋지 않음을 알게 되어 연구를 통해 사실을 조사하고 논문으로 이를 발표한 사람이다. 교육심리학 박사인 그는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는 한인들의 노력에 긍정적인 평가를 하면서도 미국 내 다른 민족들에 비해서 한인들이 투자에 따른 결과를 잘 거두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교육에 대한 투자의 결과를 측정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는 미국 내 최고 명문이라 여겨지는 대학에 입학한 한인 학생들의 졸업률을 조사했다. 그리고 한인 학생들의 졸업률이 유태인, 중국인 등 다른 민족들과 비교했을 때 현저히 낮음을 알게 되었다. 어렵게 준비해 들어 간 명문 대학을 40%가 넘는 한인 학생들이 중간에 그만 둔다는 통계가 발표되었을 때는 한국의 언론까지도 이를 보도했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오래 동안 현장에서 한인 학생들의 대학 입학 지원을 컨설팅해 온 그는 부모들이 바뀌지 않고는 절대 자녀들이 바람직한 결과를 낼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에 의하면, 많은 한인 부모들은 자녀들이 대학을 가면 자동으로 졸업을 하는 줄 안다. 그러다 보니 대학에 가서 공부할 역량을 심어주려 하기보다는 대학에 입학을 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수치로 표시되는 준비에 관심이 많은 한인 부모들은 자녀들을 얼르고 다그쳐서 학교 성적과 시험 점수를 향상시키고 치밀한 계획 아래 봉사 활동과 체육활동도 시킨다. 필요한 만큼의 성적, 점수, 시간, 기록들이 쌓이면 입시 전문 기관에 의뢰하여 가장 멋지고 눈길을 끌게끔 지원서를 작성하고 에세이를 쓴다. 이런 준비들이 나쁘다거나 문제가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철저히 준비하는 것은 오히려 장려되어야 한다. 안타깝지만 그 날 그와 나는 한인 부모들이 ‘교육’이라는 큰 그림은 제쳐두고 ‘입시’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는 데에 동의했다. 성장 과정에서 자원봉사를 통해 보람을 느꼈던 부모가 약자를 배려하고 커뮤니티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쓰도록 자녀를 이끄는 것과 아무 경험도 지식도 없는 부모가 오직 입시만을 위해 자녀를 봉사할 곳으로 보내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전자는 자녀에게 진정한 봉사의 의미를 알려주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감을 일깨워 주지만, 후자는 그저 목표를 위해 준비하고 열심히 사는 것만을 알려준다. 입시를 위해 하는 자원봉사는 따분한 노동이 되기 쉽다. 스스로 사고하고 주변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면서 커뮤니티의 문제를 보는 내면의 성숙을 시키지 않으면 자원봉사는 자녀에게 도움이 안된다. 남들이 다 하니까 덩달아 하는 각종 활동들은 그야말로 빛좋은 개살구가 될 수도 있다. 나중에는 손도 대지 않을 악기를 남들이 하니까 억지로 연주하는 자녀들에게 기쁨이 있을 리가 없다. 한인 자녀들이 참여하는 활동의 폭은 그리 넓지 못하다. 부모들이 그만큼 미국의 교육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이 하는 것을 주로 따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만나는 사람들이 비슷한 처지의 한인들이라서 몇가지 활동에 한인 자녀들이 몰려있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생각하고 준비하여 공부하는 능력을 가지게 하기 보다는 빨리 성과를 내기 위해 과외와 학원을 이용하다가 늘 과외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대학을 가서 혼자 공부하기에는 여러가지로 역량이 부족하게 된다. 2009년 미국에서 자라고 있는 자녀들을 자기가 자라던 시절 한국의 기억을 기준으로 삼아 이끌어서는 안되겠다. 자기 자라던 시절의 공부 방식을 자녀에게 꼭같이 강요하고, 그 시절의 인기 전공 과목을 자녀에게 공부하도록 권해서도 안되겠다. 자녀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으로 자녀들이 미쳐 소화하지 못하는 것들을 억지로 하게 하면 안되겠다. 뉴욕에서 만난 그 분은 한인 자녀들을 캠프에서 지도하면서 자녀들을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만들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갖도록 해서 학업에서도 성취를 늘려가도록 이끌지만, 집으로 돌아간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있으면서 안정을 잃고 공부할 맛을 잃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종종 부모들이 도움이 안된다는 이야기이다. 착각에서 깨어나 자녀 교육의 틀과 우리들의 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되었다. 과거의 기준보다는 자녀가 살아갈 시대의 환경을 생각하고 자녀가 소질을 발휘할 수 있도록, 어떤 환경에서도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역량을 심어주어야 한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10-26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영어가 권력이다

미국에 오기 전에 서울에서 살면서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해마다 여름이면 가족을 이끌고 다른 나라를 여행했다. 지도 들고 가방 메고 가족 손을 잡고 떠난 여행 길에서는 어느 나라에 가든지 영어를 해야 했다. 낯선 나라의 공항에서 버스나 전철을 타고 도심으로 이동할 때면 늘 행선지를 확인하면서 긴장 속에 영어를 해야했다. 지금 생각하니 항구와 버스 터미널, 국경 등에서는 언제나 영어를 하면서 땀을 흘리곤 했다. 고작 시간과 방향, 가격 등을 물으면서도 나는 늘 긴장했다. 그런데 내가 긴장 속에 영어를 하는 것을 보면서 어린 아들은 나에게 자주 물었다. “아빠는 어떻게 영어를 그렇게 잘 하세요?” 내가 영어를 잘 한다고? 영어를? 그 때? 하긴 그 때는 아들이 어리고 영어를 전혀 못했었다. 그 때 서울에서 초등학교 입학 전의 아들이 보기에 여행 중 나의 영어는 굉장한 놀라움이었다. 어린 아들은 외국 땅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외국어를 하는 아빠를 한없는 존경의 눈으로 보기까지 했다. 10년 전이었다. 미국에 온 이후로도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2학년부터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 아들에게 내가 영어를 가르쳐주고 작문을 지도해주는 일은 5학년 무렵부터는 불가능했다. 영어를 더 잘 하기 위한 꾸준한 노력이 없었던 탓에 나의 영어 실력은 정지된 반면, 학교를 계속 다닌 아들은 일취월장하여 미국인과 같은 영어를 구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유학생 시절 밤을 세워 책을 읽고 과제를 준비하면서 힘겹게 영어와 싸웠던 나는 한국인의 액센트를 못버리고 아직도 우리말로 사고를 한다. 조금만 집중을 흐리면 방송의 뉴스도 안들리고, 미국인이 빨리 말하는 것도 자주 놓친다. 여전히 우리말이 더 편하고, 우리말로 깊은 생각과 감정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다. 미국에 산 햇수와 나의 영어 실력은 반비례하게 되었고, 영어에 관해서는 이제 아들이 훨씬 우위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아들이 영어를 잘 하게 되면서부터 또 하나의 변화가 생겨났다. 미국에 와 수년이 지난 후, 자기는 쉽게 하는 영어를 엄마와 아빠가 능숙하게 못하자 아들은 부모를 답답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종종 미국인이 한 말을 못 알아들어 다시 묻는 경우, 뉴스를 듣다가 내용을 놓쳐서 묻는 경우, 아들의 눈에는 실망의 기운이 넘쳤다. 어린 자기도 알아듣는 것을 왜 엄마 아빠는 모르냐는 것이다. 영어 발음이 왜 그렇게 딱딱하고 어색하냐고 대어놓고 비판을 했다. 아들은 한 술 더 떠, 영어 실력이 부족한데도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서 종종 나를 몰아세웠다. 그럴 때면,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엄마 아빠가 영어를 능숙하게 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말하지만, 나는 부족한 영어 능력 때문에 부모로서의 권위가 점점 떨어짐을 느꼈다. 나는 힘 가진 사람이 맘대로 하는 ‘권위주의’를 싫어하지만, 교육을 하는데는 반드시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믿어 왔다. 부모나 교사가 권위가 없다면 어찌 자녀와 학생을 이끌며 교육이 성립하겠는가? 그리고 그 권위는 자녀가 부모와 교사를 자연스럽게 존경하는 것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자신을 이끄는 사람이 자신보다 우월하고 더 크다고 느낄 때 생겨난다. 자신을 이끄는 사람이 자신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거기에 권위는 설 자리가 없다. 케이블 티브이 서비스를 신청하거나 여러가지 공과금 납부와 관련해서 자녀에게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가 자녀들로부터 핀잔을 들은 부모들은 저마다 무력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영어 때문에 자녀들이 부모를 우습게 안다고도 한다. 과장을 보태면서 말하는 사람들은 부모가 자녀를 이끌 권력을 상실하고 자녀들이 가정내 권력을 키우는 힘을 영어로부터 갖는다고 말한다. 부모의 입장과 처지를 고려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린 자녀들이 볼 때, 분명 영어를 잘 못하는 부모는 작아보일 수밖에 없다. 영어를 능숙하게 못하면서도 자신들을 위해 희생하고 답답한 삶을 살기를 피하지 않은 부모, 성실함으로 이국에서 언어의 벽을 넘어 자기 할 일을 하는 부모를 이해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려면 자녀들이 더 자라야 할 것이다. 미국 땅에서 살면서 자녀들로부터 권력을 되찾아 자녀를 더 잘 이끌려면 영어를 더 잘 하면 좋겠다. 잘하기가 어렵다면, 잘하기 위해 노력하면 좋겠다. 이제는 아들이 잔소리를 한다. “아빠, 왜 영어 공부 안하세요?”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10-19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할아버지, 힘내세요.

매일 아침 출근길에 남양주에 계신 아버지께 전화를 드린다. 하루 일과가 시작되면 정신없이 바쁘고, 저녁에는 게을러지기에 매일 출근길에 전화를 드리기로 한 것은 지난 봄이었다. 매일 전화를 드려 서울 계신 어머니의 안부를 묻는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결심을 했다. 얼굴 뵌지 오래되어 불효자로서 늘 죄송한 맘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매일 아침 전화를 드리니 그 곳 시간으로 저녁마다 아들의 목소리를 들으시는 아버지의 목소리도 늘 반갑다. 유학길에 오르는 둘째 아들에게 건강에 유의하라고 하셨던 아버지는 그 사이 병을 얻으시고 나이도 칠십 중반을 넘으셔서 태평양을 건너오는 음성에 기침 소리가 자주 동행한다. 나의 인생에 남양주에 계신 아버지께 버지니아에서 출근길에 전화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미국 사는 아들과 한국의 아버지가 전화하는 시간은 대개 매일 15분에서 20분이다. 병중이신 아버지께 아무 것도 해드리지 못하지만, 병원에 다녀오시거나, 무슨 치료를 받으신 날이면 반드시 경과를 여쭈어 본다. 가끔 전화하는 경우에는 모아두었던 이야기들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겠지만, 매일 전화를 하다보니 화제가 마땅치 않은 경우도 있다. 다행히 이 곳에서도 한국의 소식을 매일 듣는 시대가 되어서 한국과 미국의 다양한 화제를 가지고 아버지와 대화를 한다. 아버지는 브라질이 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것을 두고 남미의 다른 나라들도 앞으로 더 잘 살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가장 관심을 두고 자주 이야기하시는 화제는 당신의 손자이다. 당신의 손자가 한창 귀여웠던 일곱 살에 미국에 온 바람에 아버지께서는 손자가 늘 그리우셨던 것 같다. 그래서 아침에 아들이 나와 함께 등교를 하면서 전화로 인사를 하는 날이면 아버지는 무척 기쁜 목소리로 반기신다. “할아버지, 힘내세요!” 아들은 늘 할아버지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인사를 한다. 오래 떨어져 있었지만 할아버지와 손자의 대화는 그런대로 이어진다. 아들이 존대말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 이럴 때면 고마울 뿐이다. 한국의 피로 회복제 광고에서 손녀가 할머니의 생신을 축하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제 말을 막 배우는 듯한 어린 아이가 할머니에게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야말로 피로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나는 아들이 할아버지와 통화하는 장면을 보면 늘 그 광고가 마음에 떠오른다. “너, 대학 가면 엄마한테 매일 전화할래?” “그건 생각해 보아야겠어요, 아빠.” 매일 아침 한국의 할아버지께 전화를 하는 아빠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눈으로 아들은 나를 바라본다. 사실 나는 아들이 대학을 가 집을 떠나면 우리에게 자주 전화하지 않을 것을 잘 안다. 용돈이 떨어져야 전화를 하는 아들에게 매주 약간의 금액만을 송금하는 어머니를 본 적이 있다. 아이들은 얼마나 우리를 떠나고 싶어하는가? ‘효’에 관해서 그리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족간의 사랑과 이해가 인단의 도리이자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늘 강조해왔는데, 나의 눈에 아들은 아직 철모르는 아이일 뿐이다. 그래도 함께 어딘가 가자고 하면, 잘 따라 나서는 아들이 아직은 고맙기도 하다. “아빠는 어떻게 매일 그렇게 할아버지께 전화를 해서 대화를 하세요?” “할아버지께서 병에 걸리셔서 치료 중이신데, 하루 하루 어떻게 지내시는지 걱정이 되니 전화를 하는 거야. 네가 아플 때 걱정을 하고, 엄마가 아플 때 걱정하는 것과 같지.” 할아버지께서 무얼 드셨는지, 낮에는 어딜 가셨는지, 잠은 잘 주무셨는지를 늘 확인하는 아빠를 보면서 아들은 그런 것까지 알아보아야 하느냐는 눈치다. 하긴 나도 그 때는 그랬던 것 같다. 나의 아버지는 늙지 않으시고, 영원히 중년의 나이로만 계실 줄 알았다. 그러나 아버지께도 환갑이 찾아왔고, 내가 아들을 낳는 바람에 아버지도 할아버지가 되어야 했다. 몇 년 전부터는 암과 싸우시고 계시다. 이제는 매일 전화를 받으시는 아버지의 존재 자체가 감사하다. 학교 공부와 입학 시험, 여러가지 활동으로 바쁜 청소년기의 아들이지만, 집안 어른들과 부모에 대한 생각을 바르게 심어주고 싶다. 우리만 미국에 떨어져 살고 있지만, 가족 간의 도리를 아들이 깊이 알면 좋겠다. 결국은 가족의 힌 구성원으로서 인간미 있는 사람만이 행복한 삶을 살기 때문이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10-05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자녀 교육과 다른 사람 따라하기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서 자신의 갈 길을 결정할 때가 많다. 변화가 빠른 시대에 살면서는 더욱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세상의 변화에 대응하는 방법을 강구한다. 많은 사람들이 비교적 좋은 결과를 낸 길을 나도 가고 싶어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마음가짐이다. 또 다른 이들의 결과를 거울 삼아 더 나은 결과를 내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무조건 따라해야 안심이 되거나,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안하면 불안해 하는 심리를 가져서는 안된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일도 있지만,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서 다른 방향을 잡아야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자녀 교육은 그러한 일 가운데 대표적인 예이다. 좋은 성과를 내었다는다른 집 자녀들이 공부한 책을 공부한다고 해서 내자녀도 똑같은 결과를 내기는 쉽지 않다. 그 자녀들이 다닌 학원을 보내어도 내 자녀까지 똑같은 시험 점수를 받기란 어렵다. 우리 자녀들이 저마다 다르고, 우리 부모들이 모두 달라서 소위 가정환경이라는 것도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오면 모두 다 공부 잘해서 자녀들이 명문대에 쉽게 가는 줄 알고 왔는데,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은 불안한 마음을 극복하고자 자녀들에게 학원과 과외 교습을 받도록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씁쓸해지는 이유는 결국 한국의 교육이 문제가 많다고 여기며, 사교육의 폐해를 피해 미국에 왔는데 미국서도 똑같은 우리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매년 졸업생들의 SAT 점수 평균이 2,200점에 가까운 미국 최고의 공립고등학교에서 아들이 공부하고 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내가 제법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아들을 학원에 보내었으리라 생각한다. 대개 많은 부모들이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은 한 번도 학원이나 개인 지도 등을 받은 적이 없이 공부해왔다. 그래서 요즘 많은 분들로부터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남들이 다 자녀를 과외 교습시키는데 어떻게 아들은 학원 한번 보내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 질문은 아들이 과외 교습 없이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를 묻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남들 다 하는 것을 어떻게 혼자만 안하면서도 마음이 편하는지를 묻는 것 같기도 하다. 학원은 부족한 학업을 보충해주고, 공부하는 훈련을 별도로 하게 함으로써, 자녀들의 학업 성취에 유익한 곳이다. 그러나 혼자서 공부해도 될 자녀를 굳이 학원에 보내는 것은 건강한 사람에게 병원을 가게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하겠다. 적절한 식생활과 운동을 하면서 살면 될 것을 병이 나은 후에도 계속 병원을 찾아가 치료를 하는 사람은 없다. 더 건강하고 싶다고 병원을 계속 가는 사람이 있는가? 반대로 학원이나 과외가 필요한 자녀들은 시기를 놓치지 말고 찾아갈 일이다. 일찍 더 공부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을 후에 갖지 않도록, 필요한 과외 공부를 적시에 하게 해야 한다. 아마도 이민 초기 자녀들과 여러 가지 이유로 학교 성적이 그리 좋지 않은 자녀들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조금만 도와주면 일어설 자녀들에게 과외 수업은 효과를 발한다. 학원이나 과외는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대학을 간 후에도 스스로 공부하는 훈련이 안되어 결국 명문대를 졸업하지 못하고 중퇴하는 학생들을 보면서도 교훈을 못얻어서는 안되겠다. 스스로 공부하는 자세와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좋은 학교도 소용이 없다. 미국의 교육 시스템은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학생들이 소위 좋은 학교를 진학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짜여져 있다. 학교 공부 외에는 별도로 가서 공부할 학원이 없는 중부와 남부의 소도시로부터도 아이들은 명문대에 진학한다. 그러니 기준은 나의 자녀가 스스로 공부를 잘해서 학교에서의 성적이 좋고, 표준 시험에서도 좋은 점수를 내느냐는 것이지 남들이 무얼 하는지가 될 수는 없다. 그 동안 아들이 최고의 성적을 내지는 못했어도 일생에 단 한번 뿐인 청소년기에 연극, 뮤지컬, 밴드, 합창 등을 하도록 한 것은 아들이 친구들 사이에서 사회성을 키우고, 세상을 더욱 크게 보도록 함이었다. 더 잘하게 하려고 학원을 보낼까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스스로 더욱 공부할 것만을 강조했다. 사실 남들이 다 하는 것을 안하거나, 안하는 것을 자신만은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용기가 필요하고, 믿음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부모와 자녀가 얻는 것은 실로 평생 동안 영향을 준다 하겠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09-28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칭찬이 자녀를 바꾼다

맥도널드에 햄버거를 먹으러 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햄버거를 먹는 이 곳은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에 수천개의 체인점을 가지고 있다. 전세계에 걸쳐 맥도널드가 하루에 파는 햄버거는 몇 개나 될까? 몇 명의 사람들이 맥도날드를 들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줄을 서고 차례가 되어 주문을 한다. 그런데 주문을 받는 백인 아가씨의 얼굴이 그리 밝지 못하다. 하루 종일 서서 일을하니 힘이 들어 그런가? 아니면 내가 백인이나 흑인이 아니고 아시안이라 좀 불편한가? 나는 주문을 하는 사이에 이 백인 아가씨의 얼굴을 살폈다. 나의 영어가 미국에서 자란 사람만큼 매끄럽지는 않아도 의사소통에는 무리가 없으니, 그것때문은 아닌 것 같다. 또 처음보는 사람을 내가 함부로 대할 리가 없으니 그녀의 무표정은 분명 그 날의 피곤함이나 다른 일로부터 왔던 것 같다. 줄을 서 기다릴 때부터 내가 본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손님을 대하고 있었다. 짧은 대화를 통해 손님의 주문을 받고, 돈을 받은 후 영수증을 내어주는 과정이 반복되니 지루할만도 하겠다 싶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미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해서 몸이 녹초가 되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자기 할 일을 하기는 하는데, 손님에게 미소를 주거나 친절한 인상을 주기보다는 담담하게 자기 할 일만을 하는 그녀였다. 주문을 받은 후 내게 영수증을 주는 그녀에게 내가 웃으며 말했다. “일을 아주 빨리 잘 하시네요. 주문을 받고 계산을 해서 영수증을 주는 시간이 아주 짧습니다.” 그녀는 나의 이런 말이 뜻밖이라는 듯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 곳에서는 얼마나 오래 일하셨나요? 일하시는 모습이 정말 숙련되어 있습니다. 주문을 받는 목소리도 아주 깔끔해서 주문을 하는 사람과 주문을 받는 사람 사이에 혼돈될 것도 없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그저 배운대로 하는 중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나는 이제 마지막 인사를 그녀에게 건넨다. “이 곳의 매니져는 분명히 기쁘겠습니다. 당신같은 직원과 함께 일을 하니까요.” 그 날,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는 내내 나는 그녀의 힘차고 밝은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맞는 모든 손님들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력이 넘쳤으며, 얼굴에는 상냥한 미소가 흘러넘쳤다. 한 사람 한 사람 상냥하게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 많은 손님들도 마음이 밝아졌을 것은 분명하다. 무엇이 그녀를 바꾸었을까? 칭찬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칭찬은 자녀를 변화시킨다. 어떤 사람들은 과도하고 불필요한 칭찬이 오히려 문제를 일으킨다고 경계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과도’하거나 ‘불필요’한 경우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경우 칭찬은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결과를 만든다.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늘 돌아보는데, 주변으로부터 칭찬을 들으면 자신의 긍정적인 모습을 스스로 그리게 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발전시키고 완성하기 위해 애쓰게 된다. 맥도날드의 백인 아가씨는 나의 칭찬 한 마디에 자신의 모습을 ‘고객에게 친절한 사람’, ‘활력적인 사람’으로 마음 속에 그렸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대로 사람들을 대했다. 칭찬은 놀라운 일을 만들어 내고 사람들의 삶을 바꾼다. 우리 집에서는 칭찬에 관해서 아내가 한 수 위이다. 아내는 아들이 밖에 나가 끼니 때 무얼 먹었는지 물어보고는 아들이 무얼 먹었든지 ‘잘 했다’고 말한다. 아내는 아들이 끼니를 거르지 않고 식사를 한 것을 칭찬하는 것이다. 또 아들이 합창 공연에서 썩 노래를 잘 하지 못해도 아내는 잘했다고 칭찬한다. 노래는 다소 부족했지만, 다른 친구들과 함께 노래하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고 좋았다고 이야기해준다. 선천적으로 약한 오른 발 때문에 친구들처럼 잘 달릴 수가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아들에게도 아내는 칭찬을 한다. “좋지 않은 발로도 그런 기록을 냈으니 얼마나 장하니? 엄마는 기쁘다. 앞으로 넌 더 잘 할 수 있단다.” 자녀에 대한 칭찬은 자녀의 장점을 찾아내는 눈이 없으면 할 수 없다. 상황으로부터 긍정적인 요소를 우선 보는 눈이 없으면, 문제점과 단점만을 거론하게 된다. 장점을 보고 칭찬을 해주면 더 좋은 결과가 있을텐데, 칭찬받지 못하고 자란 부모들은 그 기회를 놓친다. 빨리 문제점을 고치고자 하지만, 문제점을 키울 수도 있다. 인간은 감정을 가진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 사람의 하루를 바꾸는 칭찬. 그 칭찬이 자녀들의 미래를 바꾼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09-21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대화, 프레젠테이션, 리더십

미국에 공부하러 와서 놀란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학생들이 모두 자기 의견을 멋지게 발표한다는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까지 공부를 하러 온 학생들이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강의실에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마음 속으로부터 감탄과 함께 부러움이 일어났다. 그것은 영어를 잘 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 학생들은 무엇보다도 ‘자유롭게’ 자기 의사를 표현했다. 저런 이야기를 해도 될까 싶은 것까지도 편안하게 교수 앞에서 말했다. 긴장이라고는 전혀 안보이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상대적으로 권위적인 교실에서 내가 공부하면서 성장했음을 알게 되었다.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교수의 견해에 반대하는 의견을 당당하게 펼치는 미국 학생들은 나의 눈에는 분명 놀라움이었다. 강의실의 공기까지도 자유로와보였다면 과장일까? 그 다음으로 눈에 띤 것은 같이 공부하는 미국 학생들이 하나같이 논리적으로 자기 주장을 펼친 점이다. 차근 차근 자기 의견을 말하는 그들은 자기 주장의 근거를 타당하게 보여줌으로써 논리적으로 듣는 사람을 설득했다. 나도 의견을 발표하면서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애를 쓸 때 마다 무척 신경이 쓰였다. 다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잘 이야기하는데 나만이 짧게 단답을 할 수는 없었다. 조사한 내용을 정리해서 일정 시간 모두들 앞에서 발표하는 소위 ‘프레젠테이션’은 나를 더 놀라게 했다. 학생들은 저마다 아나운서처럼 자기가 준비한 것을 발표했다. 내용은 물론이고 형식도 매끄럽고 보기 좋았다. 어쩌면 말하는 방식들도 그렇게 깔끔하고 명료한지 나 자신을 더 돌아보아야 했다. 듣기 좋은 음성으로 군더더기없이 말하면서도 긴장하는 빛이 없는 그들을 보면서, 공부라는 것이 그저 지식을 머리 속에 차곡 차곡 넣는 것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 머리 속에 있는 것을 잘 정리해서 보기 좋게 펼쳐보이는 것,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발표를 하는 것은 주입식 교육의 환경에서 에서 성장한 나에게 극복해야 할 쉽지 않은 과제였다. 그 때, 초등학교 2학년으로 미국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아들은 나와 달리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1년 정도의 적응 기간이 흘러 영어에 익숙해지자 아들은 서서히 교실에서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표시했다. 아들의 담임 선생님께서도 아들이 자기 주장을 적절하게 펼친다고 하셨다. 나는 나의 강의실에서 함께 공부하는 미국 친구들처럼 어린 아들도 미국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서 자기 의견을 멋지게 펼쳐주기를 바랬다. 아들이 어릴 때부터 함께 이야기하기를 좋아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네 살, 다섯 살이었던 아들과의 여행길에서도 늘 아들에게 가는 곳과 보는 것들을 설명해주었다. 또 아들의 느낌도 늘 들어주고 칭찬을 해 주었다. 아들이 더 많이 자기 생각을 말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무슨 이야기든지 들어주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늘 물었다. 아들도 역시 늘 입에 ‘왜’를 달고 다녔다. 아주 가끔은 집요하게 묻는 아들에게 아내와 내가 손을 들고 대화를 피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세 식구가 늘 생활 속에서 많은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하면서, ‘왜’를 입에 자주 올렸다. 아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자기 주장을 펼치게 된 것은 우리 가정의 분위기 탓이 크다고 하겠다. 자유로우면서도 논리적인 자기 주장은 가족 구성원간의 편안한 의사소통으로부터 시작되어 자녀가 다수의 사람들 앞에서도 자신있게 상대를 설득하는 능력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다수 앞에서 설득력있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이 바로 그들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논리를 바탕으로 해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주장을 하는 사람, 상대를 간파하여 마음을 움직이는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사람, 상대의 주장을 포용하면서 편안하게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미국의 교육이 어린 시절부터 자기 주장을 정확하게 하고, 타인들 앞에서 자기 생각을 멋지게 펼치도록 이끄는 것은 한편으로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라고도 보인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09-14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아이 편에서 생각하는 것

아들이 자라면서 아이 편에서 생각하려 해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일들이 점점 생기고 아들의 눈높이를 도무지 파악하기 힘들 때가 많게 되었다. 아들이 고교생이 되어 2년이 지났을 때, 하루는 심각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아빠, 저 한 과목을 그만 두고(drop) 싶어요.” “왜? 공부하기가 어렵니?” “아니오, 선생님이 싫어요.” 선생님이 싫어서 공부를 하기가 싫은 것인지, 아니면 그 과목이 어려워서 공부를 하기가 싫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고교생이 학기 중에 수강 과목을 중단하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나는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도 학기 중에 수강 과목을 그만 둔 적이 없었다. 고교생인 아들이 학기 중에 수강 과목을 포기하다니, 나는 아들을 어떻게든지 설득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들은 완강했다. 아들에 따르면, 그 과목 선생님은 지나치게 까다로와서 열심히 준비를 해가도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웠다. 점점 그 과목을 공부하기가 싫어졌고, 그러다보니 학기가 끝나도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들은 카운슬러 선생님께 가서 절차를 밟아 그 과목을 자기 시간표로부터 빼기 위해 부모인 나의 확인을 요청했다. 나는 카운슬러 선생님을 찾아갔다. 무엇보다도 그 때 아들이 원하는 일이 과연 후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인지가 우선 궁금했고, 가능하면 그 과목 선생님과도 만나 아들의 문제에 대해서 조언을 듣고 싶었다. 아들의 입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선생님으로부터도 아들에 관해 듣고 싶었다. 나는 솔직히 아들이 무슨 어려움이 있든지 그 과목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공부하게 만들고 싶었다. 카운슬러 선생님은 학생이 공부하던 과목을 학기 중에 그만두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으나, 전적으로 학생과 부모가 결정할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요청한대로 아들이 그만 두고 싶어했던 과목의 선생님이 오셨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우선 한 후, 그 동안 아들을 이끌면서 보신 것들을 말씀해주시기를 요청했다. 어떤 길이라도 있다면 아들이 그 과목을 계속 공부하도록 잘 도와주시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은 나의 예상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 선생님은 시종 자신의 결백(?)만을 주장했다. 그 선생님에 의하면, 아들은 과제를 충실하게 안해오는 학생이었다. 더 잘 할 수 있지만, 열심히 하지 않아서 좋은 성적을 도무지 줄 수 없는 학생이었다. 나는 그 과목이 예능 과목이었기에 평가에 있어 선생님의 주관적인 견해를 모두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 아들이 그 과목을 준비하느라 여러 밤을 고생을 한 적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의 말만 믿기보다는 선생님의 경험을 듣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나는 그 선생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아들이 그 과목을 계속 공부할 길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바람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공정함만을 계속 피력했다. 모든 것은 아들의 책임이었다. 자신의 지도를 잘 따르지 않는 아들이 모든 문제의 중심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선생님과 대화를 하기 힘들었다. “선생님, 저는 부모로서 이 학교의 학생들이 모두 우수하고 책임감있는 아이들이라고 믿습니다. 또 그런 아이들을 지도하시는 선생님들 역시 모두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교사나 학생의 결점을 따지는 것은 그리 도움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훌륭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저의 아들과 선생님 사이의 궁합(Chemistry)이 안맞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는 웃으면서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그리고 그 선생님께서 자리를 떠나신 후, 카운슬러 선생님께 정중하게 그 과목을 아들의 수업 시간표에서 빼주실 것을 말씀드렸다. 자기 과목 수강을 중단하고 싶다는 학생의 부모 앞에서 자신의 결백만을 주장하는 선생님께 믿음이 덜 갔기 때문이다. 만일 그 분이 나에게 자신도 앞으로 더 애쓸테니, 아들이 더 잘 하도록 가정에서도 이끌어 달라는 말을 한마디만 했다면 나는 아들을 구슬러 그 과목을 계속 공부하도록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결과적으로 아들의 편에 선 모양이 되었다. 그 날 저녁이 되어 집에 왔을 때, 아들은 조심스럽게 나를 보았고, 나는 차분히 말했다. “아빠는 네 편이다. 그 과목은 그만 하게 되었어. 그리고 앞으로는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해라.” 나는 종종 그 때 내가 아들의 편에 안섰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를 상상해 본다. 특별히 무슨 일이 있었을지 떠오르는 것은 없지만, 그 당시 중요한 일에서 아빠가 자기 편이었음에 아들이 기뻐했던 것은 분명했다. 그것은 서로간의 믿음에 관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 일을 계기로 나를 대하는 아들의 태도도 바뀌었던 것을 기억한다. 아이 편에서 생각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모든 것을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아이 편에서 생각해야 할 때’를 놓쳐서는 안되겠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08-17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미제(美製) 아줌마'

원칙만 아셨던 공직자였던 아버지는 청렴하게 대한민국 공직자 생활을 하셨다.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던 70년대에 아버지께서는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일만 하셨지만, 우리 가정의 경제 형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었다. 어머니께서는 우리 남매의 속옷과 양말을 자주 기워서 입히셨고, 나는 늘 형이 입던 교복을 물려받아 입었다. 그 때는 다들 그렇게 살았는지, 아니면 우리집만 그랬는지 모르지만, 무엇 하나 여유가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종종 남대문 시장에 가셔서 우리 남매가 입을 옷을 사오셨는데, 그것들은 분명 새것은 아니었지만 제법 디자인이 좋았었다. ‘구제품’이라 불리우던 옷들이다. 미국인들이 입다가 내어놓은 것들을 걷어서 한국으로 수입해 온 것들이었는데, 종종 아주 심하게 독특한 냄새가 났었다. 어머니는 빨아도 없어지지 않는 그것이 미국인들의 냄새라고 했다. 나는 색깔과 디자인이 좋은 미제 구제품 옷을 자주 입었다. 옷말고도 ‘미제’는 또 있었다. 70년대에 드물게 미국 여행을 다녀온 부모들로부터 미제 장난감과 학용품을 선물 받은 친구들이 학교에서 연필이라도 한 자루 주는 날은 횡재를 한 것 같았다. 미제 연필이라는 게 그 때나 지금이나 황토색 몸통에 지우개가 머리에 달려있는 모양이 하나도 다를게 없었지만, 미제는 그저 좋아보였다. 그리고 ‘미제 아줌마’는 그렇게 살았던 70년대 나의 한국의 기억 속 한 부분이다. 친척도 아니면서, 친구도 아니면서 어머니를 만나러 우리 집을 찾아오는 그 아줌마는 항상 가방에 화장품과 과자들을 가지고 오셨다. 학용품과 비누, 라디오 같은 작은 전자 제품도 있었다. 모두 미제였다. 미군 부대 매점에서 구매한 물건을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팔았던 아줌마를 우리는 ‘미제 아줌마’라고 불렀다. 한 두 달에 한 번 정도 미제 아줌마가 오시면 어머니는 주로 화장품을 보셨다. 가끔은 우리 남매를 위해 캔에 들어있는 콜라와 사이다 같은 음료를 사주셨는데, 그 당시에는 모든 음료가 병에 담겨 있었던 터라 캔에 들어있는 음료를 마시는 것은 대단한 기쁨이었다. 한국의 제품들이 미제와 견주어 뒤지지 않게 될 무렵, 미제 아줌마는 더 이상 우리 집에 오시지 않았다. 80년대부터는 비누, 화장품, 전자제품, 학용품, 과자, 의류 등 한국 제품들의 질이 세계 수준으로 좋아져서 더 이상 미제라는 이유만으로는 한국인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한국에서 만든 상품들이 더 좋은 평가를 받아서 미국 시장에서 팔리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 가족이 99년에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우리는 서울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면서 많은 한국 제품들을 그리워했다. 오늘 미국 어디를 가든지 길에서 만나는 한국 브랜드의 차량들을 보면서 아들은 한국이 세계를 리드하는 국가들 중 하나라고 여긴다. 한국산 가전 제품들이 대형 매장에 전시되어 팔리고, 한국산 휴대폰이 미국인들의 손에 있다. 정보 통신 분야에서의 발전은 아들이 가장 주목하는 부분이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사람들이 사귀고, 거래를 하며, 교육을 하는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여러 국가의 많은 기업들이 한국에서 우선 신제품을 판매한 후 그 반응을 보는 것은 그만큼 한국인들의 생활 수준이 높아진 탓은 아닐까? 아들의 머리 속에는 그야말로 한국이 선진국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미 올림픽과 월드컵을 개최한 나라다. 아들에게 ‘미제 아줌마’를 말해 주다보면, 나는 분단과 남북 대치라는 한국의 현대사를 알려주게 된다. 전쟁 이후, 개발 도상국가에 미군이 주둔했고 아직 한국 경제가 좋은 제품을 생산하지 못할 때 존재했던 독특한 유통(?) 방식이라고 말해 준다. ‘미제 아줌마’가 우리 집에 오시면 무언가 좋은 것이 생길까 기대하면서, 미제라면 모두 좋은 줄만 알았던 어린 시절, 후에 내가 미국에 살면서 한국 제품을 그리워 할 때가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국에서 아들과 한국 차를 운전해서 여행을 하고, 한국에서 만든 악기를 구하러 돌아다닐 줄이야.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08-10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이름이 두 개인 아들

아들과 함께 전자 제품 매장 ‘베스트 바이(Best Buy)’에 갔을 때, 금발의 백인 여학생이 아들을 알아보고 다가와 인사를 했다. “하이(Hi), 대니(Danny)!” 아들의 학교 친구다. 아들은 반가운 얼굴로 그 아이와 대화를 한다. 조금 전까지 엄마와 우리말로 수다를 떨던 아들은 완전한 한국 사람이었는데, 영어를 하면서 친구와 떠드는 아들은 몸짓까지도 미국 사람같다. 아들이 이렇게 친구와 있을 때면 우리 아들 ‘다은’이가 아니라, 그 아이의 친구 ‘대니’라는 생각이 든다. 17년 전 아들이 태어났을 때, 아들의 출생이 하나님의 많은 은혜이며, 살아가는 동안에도 많은 은혜가 있기를 바라면서 다은(多恩)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아내와 나였다. 딸이 태어나기를 은근히 바랐던 우리는 그 이름을 그냥 아들에게 주었다. 사람들이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많은 은혜가 있기를 자동으로(?) 축복하는 장치가 되는 셈이어서 그 이름을 정하는데 아들이고 딸이고를 그리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들을 부를 때면 아들을 축복하게 되니 얼마나 감사한가? 이름대로 아들은 많은 은혜를 받았고, 앞으로도 많은 은혜를 받을 것과 그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것을 지금도 부모로서 믿고 바란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얼마 안되어 미국인들이 아들의 이름을 바르게 발음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은’자를 바르게 발음하는 미국인들이 드물었고, 하더라도 매우 힘들게 발음을 했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아들에게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은 미국인들이 부르기에 편한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많이 쓰는 이름들 중에서 아들에게 어떤 이름을 쓰게 할 지를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름들의 의미와 유래를 많이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들의 이름을 정하게 되었다. 아들의 이름을 ‘다은이’로부터 바꾸어 ‘다으니’로 써보니 그와 유사한 이름이 보였는데, 그것이 ‘대니’였다. 영화 등에서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대니’는 아들의 이름으로 쓰기에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다은이’가 ‘대니’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처럼 발음 사이의 유사점 때문이었다. 그 후, 아들은 학교에서 ‘대니’로 불리면서 ‘대니’가 되었다. 선생님들도, 친구들도 모두 아들을 ‘대니’로 불렀고, 아들도 자기 이름을 그렇게 썼다. 집에서는 ‘다은’이로 불리우다가 밖에서는 ‘대니’가 되니 혼돈이 있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조금도 불편함을 호소하지 않고 시간이 흘러 10년이 되었다. 살아오는 동안 단 하나의 이름만을 써 온 내가 두 개의 이름을 쓰는 아들을 보는 것은 재미있다. 친구들 사이의 별명이 아니라면, 특수 임무를 가진 정보원이나 자기를 숨길 목적으로 가명을 쓰는 사람들 이외에 이름을 두 개 가진 사람은 드물다. 한국에서는 이름이 아니라 개인의 신분이나 직위만 바뀌어도 새 호칭때문에 사람들은 대체로 혼돈을 한다. 원하던 직위에 올라도 사람들이 자기를 부르는 새 호칭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옛 호칭은 곧 잊어버린다. 우리는 대개 한가지 이름으로, 한가지 호칭으로 불리우며 산다. 그런데 아들은 누군가가 자기를 부를 때, 우리말 이름으로 부르거나 영어 이름으로 부르거나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반응한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흥미롭다. 사람은 사회 속에서 자기 자신을 부르는 이름이나 호칭을 동시에 몇 개까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자기가 속해서 생활하는 집단이나 사회의 수만큼일 것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아들을 정작 보면 신기할 때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아들이 속한 집단의 수 때문이 아니라, 그 집단의 문화가 서로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 ‘다은’이라고 불리우는 곳과 ‘대니’라고 불리우는 곳의 문화가 다르고, 아들의 행동도 따라서 다른 것을 내가 흥미롭게 느끼는 것이다. 군대 시절, 전투비행대대에서는 늘 완전무결을 강조하던 까다로운 조종사가 기지교회에서는 ‘집사’로불리우면서 한없이 친절하고 관용적이었을 때도 나는 비슷한 감정을 가졌었다. 내가 아들처럼 미국 문화를 몸에 완전히 익히지 않는 한, 영어 이름을 쓰면서 살아가는 아들은 내 눈에 계속 각별하게 보일 것 같다. 개인의 이름은 이름을 넘어 한 사람의 문화 정체성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08-03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아들의 운전 면허

작년에 생일이 되기 6개월 전에 아들은 운전면허 필기 시험을 보았다. 만 16세가 되기 6개월 전이면 필기 시험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아들은 그 날 만을 기다린 것처럼 주말에 차량국(DMV)에 갔다. 그 날 시험을 보고 임시 면허(Permit)를 받은 아들은 운전 면허를 가진 사람이 동승하여 지도하면 운전을 할 수 있다는 법 규정에 의해 아내와 나의 동승으로 운전을 시작했다. 안고 다니던 어린 아이가 어느새 자라 운전을 하니 대견하다는 기쁨이 있었으나, 그것은 잠시였다. 처음에는 조심하고 부모의 말을 경청하던 아들도 서서히 운전이 익숙해지자 겁없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운전이라는 것이 차량을 움직이는 것이라기보다는 교통 상황 속에서 안전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아무리 말해 주어도 아들은 잔소리로만 듣는 것 같았다. 아들의 부주의로 종종 위험한 상황을 만날 때면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주의성 경고들이 아들에게는 모두 불필요한 잔소리로 들린 것 같았다. 사고가 안났으면 그만이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나중에는 아빠가 너무 걱정이 많고, 자기를 너무 안믿는다고 엄마에게 불평을 했다. 아들은 급히 출발하고 급히 멈추었으며, 종종 차선을 변경할 때 안전 거리를 확보하지 않은 채 옆 차선으로 가는 바람에 다른 차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사고 일보 직전에 위기를 모면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교통사고라는 것이 일단 벌어지면 사람이 다치는 일이기에 나의 잔소리는 멈추어지지 않았다. 참고 참고 또 참아서 부드러운 말로 주의를 줄 때는 운전을 하다가 아들이 곧 사고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까지 머리에 떠올랐다. 또 작은 사고를 한 번 당해서 운전 무서운 것을 제발 알았으면 하는 어리석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들은 법 규정이 요구하는 부모와의 운전 연습 시간을 채운 후, 운전학교 프로그램도 순조롭게 마쳐서 이제는 혼자서 운전할 수 있는 증명서를 발급받아 가지고 있다. 곧 법원에 가서 교육을 받으면 정식 운전면허증도 받게 된다. 또 그 동안의 연습과 경험으로 인해서 전보다 조심스런 운전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 두 번 친구를 만나러 차를 가지고 나갈 때면 아내와 나는 아들에게 매번 무사고와 안전 운전을 당부한다. 운전이 익숙해지고 재미있을수록 경계심도 풀어지며, 실제로 십대들의 사고 소식이 끝없이 들려오기 때문이다. 어제는 아들의 운전실력을 점검하고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 모처럼 아들에게 운전을 하게 해서 워싱턴 디씨를 갔다. 66번 고속도로를 운전해서 달리는 아들의 눈에는 스피드를 즐기는 기쁨이 가득했다. 잔소리를 일체 하지 않으면서 고속도로를 지나 워싱턴 디씨로 들어갔다. 아들은 좁아진 차선과 늘어난 차량들에 잠시 긴장했으나, 금방 익숙해져서 백악관과 워싱턴 모뉴먼트를 지나 국회의사당까지 무리없이 운전을 잘 했다. 국회의사당 앞 주차장에서만 후진 주차에 서툴러 나의 조언을 들었다. 해질녘 국회의사당 건물을 등 뒤로 하고 서니 멀리 워싱턴 모뉴먼트가 보이고 링컨 기념관이 작게 보인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미국 각지로부터 온 관광객들이다. 엄마와 아빠가 아들 딸과 모처럼 마음먹고 미국의 수도를 방문하여 추억 거리를 만드는 중이다. 아들이 서너살 무렵 우리 가족도 그렇게 아시아의 도시들을 여행했던 기억이 난다. 디지털 카메라가 없던 시절, 여행 후에는 늘 사진 인화를 맡겨 놓고 얼마나 기다렸던가? 가족 여행은 그렇게 구성원들에게 추억을 남겨주었다. 저 사람들도 훗날 오늘의 워싱턴 디씨 여행을 기억하고 가족의 추억을 행복하게 여길 것이다. 그나 저나 아들이 운전을 하게 되었으니 아내와 내가 아들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 여행을 하는 때가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너무 급한 것일까? 오래 전 하루 종일 운전을 해서 몇 개 주들을 관통하는 여행을 할 때, 언제 목적지에 도착하냐며 그림책을 보던 아들이 이제는 스스로 운전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세월의 빠름을 또 한 번 느낀다. 아들은 자라도 나는 나이를 안먹는 수는 없을까?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07-27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긍지는 가지되

한글처럼 다양한 생각을 전달하고 아름다운 표현을 가진 언어는 이 세상에 없다고 배웠다. 금수강산이라 불리우는 대한민국의 자연이 세계 최고인 줄 알았다. 한국의 가을 하늘처럼 파란 하늘은 다른 곳에는 없는 줄 알았다. 한복만큼 아름다운 전통 의상도 없다고 들었다. 한국인의 두뇌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믿었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한국을 떠나 다른 곳을 둘러보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 보니 생각이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오래 믿었던 생각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다. 믿었던 것과 사실이 조금씩 다르자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 금수강산 말고도 아름다운 나라가 또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각국의 문학인들은 자기 언어로 모두들 아름다운 글을 쓰고 있었다. 한국인만이 우수하지 않고 모두가 다 우수한 두뇌를 자랑했다. 나는 일본의 모든 것을 싫어하기만 했었다. 그런데 일본의 전통 의상인 기모노가 아름다와 보이게 된 것은 순전히 한국을 떠나 한국을 바라보면서, 다른 민족들과 만나 다양한 문화를 만난 탓이었다. 역사는 역사이고, 아름다움은 인정해야 했다. 내가 기모노의 아름다움을 느끼는데 3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으니, 고정 관념의 위력은 대단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한국을 벗어나 다른 곳에 살지 않고서 객관적으로 우리 것을 느끼고 다른 민족들과 그들의 문화를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루는 PTA에 다녀 온 한인 어머니로부터 모임 내내 미국인 엄마들로부터 환대받지 못하고 약간 소외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웃으며 인사를 했지만 백인 엄마들이 잠시 인사만 할 뿐, 도무지 친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그 순간 나의 머리에는 서울에서 사는 외국인 엄마들, 특히 우리들이 후진국으로 분류하는 나라들로부터 온 엄마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와 피부빛이 다르고 외모가 다른 엄마들이 자기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학교를 방문하면 서울의 우리들은 그들을 얼마나 환대하고 친하게 대할 것인가? 다른 인종과 민족을 이해하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그들과 친해지는 것은 쉽지 않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선진국 소리를 듣는 나라들에서도 인종과 민족간의 마찰과 갈등은 끝이 없다.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바깥 세상을 모르고 자기들이 최고라고 믿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다른 민족들과 그들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도, 다른 이들도 훌륭한 사람들이며 그들의 문화와 역사가 그들에게 얼마나 아름답고 자랑스런 것인지를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의 그것들도 인정받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유목과 상업을 주로 한 서구인들이 여러 지역을 다니며 문화적 다양성을 일찍부터 인정한 것과 달리 우리 민족은 농경 중심의 자급 자족 정착 생활을 한 탓에 타민족을 접할 기회가 적었고, 그 결과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사고가 부족한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그들이 교역을 하기 위해 상대를 공부하고 인정한 반면, 우리는 우리끼리 우선 돕고 잘 살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교통 수단의 발전으로 세계가 지구촌이라 불리운지 오래이다. 그리고 요즘은 기술의 발전 덕에, 지리적으로는 멀더라도 같은 공간에 사는 것처럼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살게 되었다. 기술과 유행의 전파 속도가 대단히 빠르고, 거의 국가간의 장벽이 없다시피 된 시대이다. 그래서 개인의 사고가 온라인 공간에서 다수에 의해 의미있게 변하는 시대가 되었다. 아이들이 블로그에 써놓은 글을 전 세계의 친구들이 다 읽고 댓글을 달아준다. 미국에 있는 우리의 아이들이 유럽과 아시아의 친구들과 동시에 팀을 이뤄 게임을 하는 것은 보통이다. 우리 아이들은 한국인이면서도 세계인으로서 커야 한다. 한국인의 긍지는 가지되 다양한 사람들의 문화와 서로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존중하게 이끌어야 한다. 우리 앞의 어떤 이방인이 자기 민족이 최고이고 자기 문화가 가장 우월한 문화라고 주장하거나 암시한다면 우리는 그를 어찌 볼 것인가. 자기 민족의 문화를 자랑하되 우리 음식을 맛있게 먹는 사람이 더 좋지 않은가? 그가 자기 말과 글을 자랑하되 한글도 배우려 한다면 기꺼이 친구가 되고 싶지 않은가?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07-20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엄마같은 가디언

보다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시키고자 하는 부모들의 열성때문에 부모를 떠나 미국에 와서 공부를 하는 한국 청소년들을 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요즘이다. 중고생들이 많고 초등생도 있다. 그리고 이들이 숙식을 하며 지내는 곳 또는 그 형식을 홈스테이라고 부르며, 부모의 역할을 대신해 주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가디언이라 부른다. 과거에는 가디언이 집 떠난 학생의 자고 먹고 입는 것을 챙기는 것을 중요시했지만, 근래에는 점점 학업을 지도하고 생활을 관리하는 기능을 중요시하고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청소년들의 시기가 인생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그 시기에 할 일, 즉 공부를 등한히 했다가는 두고두고 후회를 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이 부모와 함께 살아도 공부를 위해 전념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집을 떠나 다른 사람의 지도 아래 하루 하루 공부를 꾸준히 하는 것은 가디언과 학생 상호간의 원활한 소통은 물론 많은 배려가 필요하다. 공부를 하기 위한 여건 조성은 기본이고, 심리적인 안정을 갖도록 세심한 배려가 따라야 한다. 지난 학기에는 가디언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 일이 있었다. 아들이 참여하여 노래하는 학교 합창단의 공연이 있던 날, 남학생들만의 합창이 한 순서 있었다. 노래를 하기 위해 무대에 오른 남학생들이 정렬을 하고 있을 때, 안내가 흘러나왔다. “다음 곡은 우리들의 엄마들에게 바치는 노래입니다. 아들이 앞에 있는 엄마는 한 분도 빠지지 마시고 무대 앞 좌석으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무대 위의 아이들은 모두 손에 장미를 들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나면 엄마들에게 드릴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내가 앞으로 나갔다. 노래는 유명한 노래 ‘My Girl’을 ‘My Mom’으로 부분 부분 개사한 곡이었다. 모두가 웃으며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자 마자 아이들은 무대를 내려와 엄마들에게 꽃을 드렸다. 꽃을 받은 엄마들은 한결같이 아들을 안아주고 자리로 돌아갔다. 아들과 엄마간의 사랑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무대였다. 그 때 나의 머리를 잠시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런 행사에서 만일 부모가 한국에 있는 아이는 누구에게 꽃을 드릴까? 또 영어가 서툰 엄마가 안내를 이해하지 못해 앞에 나가 있지 않는다면 노래를 마친 아들은 얼마나 마음이 안타까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남의 아이들도 소중하고 예사롭지 않게 생각되는데, 더우기 미국 땅에 와서 살면서 자녀 교육을 하니 다른 이들의 자녀들에게도 각별히 눈이 간다. 할 수 있다면 서로 도와 모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많은 한계가 따른다. 가디언의 역할을 하시는 분들도 마찬가지라고 여겨진다. 아마도 자기 자식을 키우는 것 이상의 어려움과 희생이 있을 것이다. 학생이 미국에 오기 전의 환경과 성장 과정도 제각각 달라서, 부모도 아닌 입장에서 아이들을 이끄는 것은 정말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종종 들려오는 가디언과 홈스테이 학생들간의 불화 이야기는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지도를 잘 따르지 않는 아이들을 이끄는 것처럼 힘든 일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러나 부모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는 가디언들 중에는 아이들이 공부 이외에도 각종 활동을 하도록 적극 돕는 가운데 여러가지 발표회도 꼬박꼬박 가는 분들이 계시다. 스포츠 게임마다 가서 응원을 하는 가디언도 있다. 가디언이 ‘하숙’집 아줌마 아저씨가 아니라, 성장기의 중요한 시기의 아이들을 이끌어 공부하게 하면서 다른 활동도 적극 돕는 역할을 하는 분들이라 한다면, 시대가 급변하고 교육 환경도 다른 미국 땅에서 오늘 가디언을 하시는 분들은 더욱 그 역할이 중요하고도 힘든 것 같다. 어려움 가운데 아이들을 이끄는 가디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07-13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없어도 할 수 있다

17년 전 아들이 태어나던 날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날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아들의 태어남을 축하하던 날, 나는 신생아실에 가 아들의 손을 보고 그만 쓰러질 뻔 했었다. 아들의 오른손 가운데 세 손가락이 마치 약물에 의해 녹아버린 듯 형태가 없었기 때문이다. 간호사는 이제 막 태어난 핏덩이 아들의 손에 잉크를 묻히고 탁본을 만들려 하다가, 황급히 나에게 연락을 했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 그런 것일까, 나는 그 날 밤 한숨을 못이루고 병원 복도에서 안암동 야경을 내려보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 왜 하나님께서 나의 아들에게 온전한 손을 주시지 않았는지 수도 없이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러나 한숨과 눈물 속에서도 아들은 무럭 무럭 자랐다. 부족한 세개의 손가락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 것만 같았던 아들은 밝게 자라서 유치원을 갔다. 또 어린 아들이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입학해서 동네 친구들과 조잘거리며 학교를 다니던 모습은 지금 기억해도 정겨운 장면이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과 땀을 뻘뻘 흘리면서 놀다가 들어오던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나의 걱정이 지나쳤음을 알게 되었다. 늘 엉터리 아빠인 나는 그 때, 아들이 손가락때문에 친구들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할 것을 적정했었다. 조금만 다르고 부족하면 무시하고 따돌리는 풍토에서, 그렇게 어린 아들이 친구들과 잘 지내면서 학교를 잘 다니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함께 놀고 학교를 다니던 친구들과 헤어져 미국에 올 때, 아들은 친구들과의 헤어짐을 안타까워했다. 그 후 아들이 미국에 와서도 순조롭게 적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들이 부족한 손가락으로 인해 무언가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달려들어 하면 무엇이든 성취한다는 평범한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하나만 빼고는. 교회 성가대 반주자 생활을 20년 넘게 한 아내는 동네 꼬맹이들을 모아서 피아노를 가르쳤었다. 그런데 어린 아이들이 고사리같은 손으로 피아노를 치는 것을 매일 보면서도 아내는 정작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칠 수 없었다. 선천적으로 손가락이 세개 부족한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친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교본과 음악이 온전한 손들을 위해 만들어졌음을 아는 나와 아내는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린 아들에게 잠시 배우라고 했지만 아들이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았을 때, 아내는 다그치지 않고 가르치는 것을 그만 두었다. 미국에 온 후, 초등학교에서 아들은 오른손 손가락을 쓰지 않는 악기 가운데 바이올린을 배워 연주했다. 그리고 중학교에서부터는 트롬본을 불었다. 고등학교에서 재즈밴드까지 참여한 아들이 콘서트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아들이 음악을 즐길 수 있음을 기뻐했다. 그런데 하루는 아들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자기가 모은 돈으로 기타를 사러 간 악기사에서 한 번도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운 적 없는 아들이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니 이 아이가 언제 피아노를 배웠나, 나의 머릿속에는 많은 질문들이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아들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남성합창단을 만들어 노래를 부르다가, 어디선가 좋은곡을 들으면 자기들이 부르기 좋게 편곡을 하곤 했는데, 결국 학과목으로도 AP 음악 이론을 수강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편곡하는 일을 능숙하게 즐기게 되었다. 그리고 피아노를 배운 적 없는 아들은 피아노 대신 컴퓨터를 이용해서 편곡을 하고 작곡을 했다. 사실 옛날같으면 꿈도 못 꿀 일이지만, 아들은 컴퓨터를 이용해서 작곡을 하고, 컴퓨터로 자기 음악을 연주시킨다. 컴퓨터는 현악 사중주도 교향악단의 연주도 모두 해준다. 그런 가운데 아들의 음악 지식이 늘어났고, 배운 적 없는 피아노이지만 흉내를 내게끔 된 것 같았다. 나의 놀라움은 아들이 양손을 다 써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는 사실이었다. 거의 없는 손가락, 3분의 1마디도 없는 그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는 아들을 보면서 나는 마치 아들에게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없는 것만 보고 가르치지 않았는데, 너는 혼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쓰는구나.’ 아들이 음악을 공부하겠다고 하여, 그 편에서 생각하고 그 길을 가게 하기 위해 준비하는 요즘이다. 늦은 것 같기도 하지만, 없는 것을 볼 줄 알고 쓸 줄 아는 아들을 믿는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07-06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유연해야 행복하다

‘입신양명’이라는 말이 대부분 부모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다. 중국의 고전에 나오는 이 말은 자신을 바로 세워 이름을 떨친다는 뜻을 지녔는데, 언제부터인가는 출세하여 유명해지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원래 중국에서는 한 사람이 사는 동안에 유명해지지 않아도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는 일을 함으로써 후세에 인정받고 이름을 떨침을 그 의미에 포함했으나, 요즘은 조금이라도 빨리 성취하여 젊은 나이에 인정 받는 것을 선호한다. ‘충’과 ‘효’가 우리들에게 중요한 덕목인 것처럼 ‘입신양명’도 중요한 덕목이 되어 모두들 이름을 내고 싶어 한다. ‘입신양명’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개인들이 더 열심히 일하고, 자녀들이 더 열심히 공부하여 성취함으로써 국가와 사회가 부강하고 발전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또 ‘입신양명’이라는 생각 자체가 미래 지향적이어서, 개인으로 하여금 타인에게 인정 받을 만큼의 성취를 하게 하고 도전을 장려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큼의 자리에 오르고, 특출한 업적을 사는 동안 보여야만 한 개인이 행복할까? 아들이 미국에 와서 초등학교 2학년으로 학교를 들어가 다니기 시작했을 때, 하루는 교회에서 또래 아이들이 모여서 게임을 하면서 놀았다. 간단한 도구를 이용해서 놀면서 점수를 계산한 후, 승자를 결정하는 게임에서 좋은 점수를 기록하지 못했던 아들이 게임을 그만두고 밖으로 나가는 일이 벌어졌다. 잘 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게임이 되지를 않아서 속이 상했던 아들은 건물 밖에 나가서 혼자 씩씩 거리다가 아내를 보고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 날 우리는 아들을 데리고 교회를 나와서 아들을 진정시킨 후 차근 차근 아들과 대화를 했다. 어린 아들의 생각은 단순했다. 자신이 열심히 했으므로 좋은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속이 상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의 경쟁에서 뒤로 밀렸다는 생각을 하니 화가 나서 더이상 게임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다른 아이들은 승패와 상관없이 모두 웃으면서 게임을 즐기니 자신이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들을 야단치지 않고, 차분히 타이르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었다. 도대체 언제나 이기기만 해야 한다거나 항상 모든 일에서 남보다 앞서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없었는데, 고작 일곱살 짜리가 친구들과의 게임에서 이기지 못했다고 그렇게 속상해 하다니. 한편으로는 그렇게 악착같은 마음이 있어야 나중에 무언가를 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함께 있던 친구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것은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내가 직접 말한 적은 없었지만, 은연 중 아들에게 경쟁에서 무조건 이길 것을 가르친 것은 아닐까. 그 날 다른 집 부모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눈빛은 마치 우리가 늘 아들에게 이기기만을 가르쳤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후에 비슷한 순간은 또 왔다. 학생들간의 경쟁이 심한 과학고등학교에 아들이 진학하여 좋은 성적을 기록하지 못하고 첫 해를 보낸 후, 심각하게 전학을 고려한다고 내게 말했을 때, 나는 우리가 미국에 온 지 얼마 안되어 겪었던 그 날을 떠올렸다. 시험으로 선발된 아이들끼리 무한 경쟁을 벌이는 학교에서 아들의 성적은 전에 없이 초라했고 아들의 자존심도 구겨질 대로 구겨져 있었다. 그대로 가다가는 초라한 성적으로 소위 명문대학을 가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아들에게 학교를 옮기지 말고 계속해서 공부할 것을 권했다. 어찌 사람이 언제나 남보다 앞서고 좋은 결과만을 얻겠느냐고 말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을 던지는 노력없이 좋은 결과를 얻으려 하면 안되는 것과 아울러 자신이 남보다 부족해 보이고 경쟁에서 뒤에 있을 때도 그 경쟁의 장을 떠나기 보다는 계속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해주었다. 그것이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을 성장시키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아들은 학교를 떠나지 않았고,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지 못했어도 여러가지 클럽 활동에 참가하면서 학교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성적도 조금씩 향상되었다. 개인의 행복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에 살면서 내가 생각하는 행복과 아들의 머리 속에 있는 행복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알았지만, 아들도 나도 거기에 유연성을 더 많이 부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워 하되, 이름을 떨치지 못하고 남보다 앞서지 않았다고 우울해 할 이유는 없다. 유연해야 행복하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06-29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굳세어라, 아들아

나는 아들이 공학을 공부하고 나서 세계적인 신기술을 개발하기를 원했었다. 오래 전부터 과학 기술이 세계를 변화시키고 사람들의 삶을 편리하게 만든다는 믿음을 내가 가져 온 것은 서울에서 일할 때 과학자들을 많이 만났던 탓이기도 했다. 일을 하면서 만난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은 잘 만든 제품 하나가 한 국가를 먹여 살리는 현실을 나에게 말해 주었다. 그래서 앞서가는 신기술 한 가지가 국가 경제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물론 인류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나는 항상 하고 있었다. 아들이 공학을 공부하기를 바란 것은 그런 이유였는데, 아들에게 과학적 적성보다는 문과적 성향이 더 강함을 알게 된 뒤로는 막연하게라도 목표를 세워 공부를 독려해야겠다는 생각에 우선 로스쿨을 가도록 권했었다. 어려서부터 글 잘 쓰고 질문이 많았던 아들이 인문학적인 소양을 갖추는 가운데 법을 공부하면, 현실 세계에서 기여할 일도 많아 보여서, 꼭 법관이나 변호사가 아니어도 여러가지 분야에서 일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했다. 기업과 정부에는 로스쿨 출신들이 얼마나 많은가? 법정에서 판사와 변호사로 서지 않아도 법을 공부한 사람들이 여러 분야에서 일하는 것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아들이 공학자가 될 가능성이 없음을 안 후부터는 아들에게 로스쿨 진학을 권해왔었다. 그러나 몇 개월 전, 아들은 나의 바람과 달리 음악을 공부하겠다고 말했다. 영화 음악 작곡을 전공하겠다는 아들을 보면서, 부끄러울 만큼 화도 내었고,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도 다 해주었지만 아들의 의지는 강하기만 했다. 아내는 속상함을 숨기지 못하고 눈물까지 지었는데, 아들은 차갑게 자기 의지의 굳음을 과시하고 있었다. 무엇으로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확인할 것인가? 왜 아들은 그리도 음악을 고집하는가? 나의 속상함은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으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꾸준한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아들은 능숙하게 연주하는 악기로 대회에 나가 상을 받은 적도 없었다. 학교 밴드 등에서 연주하고, 학교 합창단과 뮤지컬에서만 노래를 했지, 개인적으로 음악적 능력을 검증받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들이 타고난 재능없이 약간의 즐거움만으로 갈 길을 정하는 실수를 할까 걱정을 했다. 그런던 중, 이 달 초, 나는 아들이 지역의 다른 고등학교 스프링 콘서트에 가야한다고 해서 함께 가게 되었다. 이 지역 고교들 중에서 가장 연주를 잘 하는 오케스트라로 평가받는 학교답게 학생들의 연주 실력은 훌륭했다. 클래식과 영화 음악, 대중 음악을 오가는 그 날의 프로그램은 청중들의 귀를 즐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그 날의 연주 곡목 중 한 곡의 편곡자로 아들의 이름이 인쇄되어있는 것이 프로그램에 보였다. ‘그래서 이 놈이 왔구나.’ 아들이 그 전부터 그 날의 콘서트 이야기를 한 것이 기억났다. 작년부터 아들은 학교에서 AP 음악 이론을 공부하면서 학교 합창단에서 부를 노래들을 편곡했다. 또 자기 맘에 드는 음악들을 골라 현악4중주 등으로 편곡을 해서 친구들에게 연주를 하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음악을 연주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영상에 담아 유투브에 올려놓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영상을 보았고, 아들의 편곡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들이 미 전역으로부터 아들에게 악보를 요청해왔다. 그러다가 지역의 한 고등학교 오케스트라 디렉터가 그 동영상을 보고 아들에게 자기 학교 오케스트라가 쓸 음악을 요청해 와서 아들은 오케스트라를 위해 편곡을 했다. 그 날, 지휘자는 아들이 편곡한 곡을 연주하기 전에 곡을 해설하고 아들도 소개를 했다. 고교생이 편곡했지만 현악기의 각 파트 특성을 파악하여 편곡이 잘 되었음을 소개한 지휘자는 청중 가운데 그 편곡자가 와 있다며 아들을 호명했다. 아들이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청중에게 인사를 하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아들이 음악을 하는 것을 실감했다. 그 동안 아빠인 나의 머리 속에는 아들이 음악을 하는 모습이 의미있게 그려진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아들은 혼자서 음악을 공부하고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지난 주에 나는 아들에게 기타를 들고 와서 피아노 앞에 앉게 했다. 가장 좋다고 여겨지는 각도에서 아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이 사진을 사용해라. 인터넷 공간이나 다른 모든 곳에서 너의 이미지를 보여줄 때 이 사진을 써라. 너는 음악하는 사람이다.” 아들이 무슨 공부를 하건, 무슨 일이 아들에게 일어나든지 아들 편에 서야겠다. 페어팩스 거주 학부모 김정수 jeongsu_kim@hotmail.com

2009-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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